중세 시대 체스가 사회적 계급이나 인종을 넘어 지적 능력을 겨루는 평등의 장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9일(현지시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따르면 이 대학 역사학자 크리스티나 일코 박사는 학술지 '스페큘럼'에 발표한 '세계 중세 시대의 체스와 인종'이라는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논문은 중세 미국학회의 '비판적 인종 연구 논문상'을 수상했다.

일코 박사는 중세 시대의 필사본, 그림, 체스 세트 등을 분석한 결과 체스가 피부색과 관계없이 승자의 지적 능력을 존중하며 당시의 사회 구조와 인종적 태도에 도전했음을 발견했다.

대표적인 증거는 1283년 스페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를 위해 제작된 '체스에 관한 책'(Libro de axedrez)이다. 이 책에는 흑인 체스 선수가 백인 성직자를 상대로 승리를 앞둔 채 여유롭게 와인을 즐기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는 당시 무슬림 포로를 강제로 세례시키거나 유색인종이 백인 기독교 순교자를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다른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 책에는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출신의 다양한 유색인종 선수들이 지적 능력을 뽐내는 장면이 다수 포함돼 있다. 한 장면에서는 무슬림과 유대인 선수가, 다른 장면에서는 몽골인으로 보이는 선수들이 경기를 펼친다.

일코 박사는 "중세 문헌들은 체스가 유혈 없는 전쟁이자 정의로운 세계를 상징한다고 반복해서 언급한다"며 "체스는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지적으로 교류하는 강력한 매개체였다"고 설명했다.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에 등장하는 삽화도 중요한 근거다. 기존 학자들은 페르시아 재상이 인도 대사를 체스로 이기는 장면에서 인도 대사를 검은 피부로 묘사한 것이 그의 패배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일코 박사는 이를 존경받는 지식의 수호자로 묘사한 것이며, 당시 백인 중심적 가치관에 도전한 사례라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14세기 후반 마요르카의 한 제단화에는 검은 피부의 무슬림 왕이 체스를 두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일코 박사는 이 그림 역시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적이던 중세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일코 박사는 "체스는 지적 능력이 중요한 논리의 게임"이라며 "피부색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