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구진이 인유두종바이러스(HPV) 양성 암세포가 면역체계를 회피하는 핵심 기전을 규명하고, 이를 무력화해 암을 치료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헨리 포드 헬스·미시간 주립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MARCHF8'이라는 특정 단백질이 암세포의 면역 신호 분자를 파괴해 면역 감시를 피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HPV 양성 두경부암 등은 암세포 표면에서 면역체계에 이상을 알리는 신호인 '주요조직적합성복합체-1'(MHC-I) 분자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치료가 어려웠다.

이번 연구는 HPV가 MARCHF8 단백질을 이용해 MHC-I 분자를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면역체계로부터 숨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실제로 연구팀이 실험 모델에서 MARCHF8 단백질을 제거하자, 기존 면역항암제에 반응하지 않던 종양에서 면역반응이 즉각적으로 회복됐다. CD8+ T세포와 자연살해(NK)세포 등 면역세포들이 종양 내부로 빠르게 침투해 암세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논문의 제1 저자인 모하메드 칼릴 연구조교수는 "MARCHF8을 제거하자 T세포가 활성화되고 종양미세환경으로의 T세포, 자연살해세포, 대식세포 침투가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이끈 편도훈 미시간 주립대 교수는 "이번 발견은 기존에 치료가 불가능했던 종양에도 효과가 있었다"며 "치료 반응이 없는 '차가운 종양'을 면역 반응이 활발한 '뜨거운 종양'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 발견을 토대로 인체에서 MARCHF8의 기능을 차단하는 신약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이 신약이 개발되면 기존 면역항암제와 병용해 치료 저항성 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치의학두개안면연구소로부터 300만달러(약 43억20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