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던 엔화의 공식이 깨지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 긴장이 고조됐음에도 엔화 가치는 오히려 하락했다. 엔·달러 환율은 2024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인 159엔대 후반까지 올랐다.

블룸버그는 이번 엔화 약세의 가장 큰 원인으로 국제 유가 급등을 지목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북해 브렌트유는 한때 배럴당 120달러에 육박하며 약 4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은 유가 상승이 무역수지 악화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직결된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점이 시장에서 '고유가=엔화 매도'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통신은 분석했다.

달러 강세 역시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면서 고유가가 오히려 교역 조건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인플레이션 우려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감이 후퇴한 점도 달러 가치를 지지하고 있다.

엔화 약세는 달러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통화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엔화는 스위스프랑 대비 사상 최저치를, 호주달러 대비로는 1990년 이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의 낮은 금리로 인해 엔화가 캐리 트레이드의 자금 조달 통화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위기 시 일본 투자자들이 해외 자산을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자금 회귀' 현상으로 엔화가 강세를 보일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장기간 저금리를 겪은 일본 기관 투자자들이 고수익 해외 자산 투자를 쉽게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가타야마 사츠키 일본 재무상은 과도한 엔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으나 시장 개입 여부는 불투명하다. 일본 정부는 2024년 달러당 160엔 선에서 엔화 매수 개입을 단행한 바 있다.

블룸버그는 과거 '위험 회피=엔화 강세' 공식이 에너지 수입국으로서 일본의 취약성과 주요국과의 큰 금리 차이로 인해 더는 통용되기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