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동 분쟁으로 급등한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면서 유럽 동맹국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는 등 대서양 동맹에 균열이 심화하고 있다.

1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이날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 완화 조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메르츠 총리는 기자들에게 "어떤 이유에서든 제재를 완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유가 문제는 공급 부족이 아니라 전쟁 관련 불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에 앞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 간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상이 제재 해제에 반대했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 정부 결정의 동기를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미 재무부는 이번 조치가 이미 해상에서 운송 중인 러시아산 원유의 구매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이번 조치는 이미 운송 중인 원유에만 적용되는 단기적 조치"라며 "러시아 정부에 상당한 재정적 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치는 4월 11일 만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즉각 반발했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미국의 가장 가까운 군사 동맹국인 영국 역시 제재 완화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이번 중동 전쟁을 "불법"이라고 비판하며 미국에 "실행 가능하고 심사숙고한 계획이 없다"고 지적했다. 스페인은 이란 작전에 참여하는 미군의 주요 해군기지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번 갈등의 배경에는 중동 분쟁이 러시아에 의도치 않은 이익을 주고 있다는 유럽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란이 세계 원유 수송량의 5분의 1이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은 다시 증가했으며, 일부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현재 하루 1억5000만달러(약 2160억원)의 석유 판매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13일 미국의 결정이 러시아에 전쟁 자금 약 100억달러(약 14조4000억원)를 안겨줄 수 있다며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번 사태는 대서양 동맹의 근본적인 신뢰 문제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 각국은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규모의 재무장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지만, 미국의 무기 공급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과의 전쟁에 군수품을 소진하면서 유럽의 무기 인도 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동맹국과의 협의를 거부할 때 전략적 오판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지적한다. 슬라보미르 뎁스키 유럽대학 전략학 강사는 "미국이 유럽을 동맹 의식의 원천이 아니라 힘들게 얻은 전략적 지식의 저장소로 대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