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벤처캐피털(VC) 자금이 유럽 인공지능(AI) 스타트업으로 대거 몰리면서, 유럽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규모와 기업가치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12일 블룸버그통신은 데이터 분석업체 피치북(PitchBook) 자료를 인용해 2024년과 2025년 사이 유럽 스타트업의 중간 자금 조달 규모는 32% 증가해 2020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 투자자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 유럽 전체 펀딩 라운드의 5분의 1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10년 전 10분의 1 수준에서 두 배로 늘어난 수치다.

특히 AI 분야 스타트업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메타의 AI 연구 책임자였던 얀 르쿤이 이끄는 프랑스 파리의 AI 스타트업 AMI는 최근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인 10억달러(약 1조4400억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35억달러(약 5조400억원)를 인정받았다. 설립 3년차인 스웨덴 스타트업 러버블(Lovable)은 지난해 12월 66억달러(약 9조5040억원)의 가치를, 2023년 설립된 법률 AI 스타트업 레고라(Legora)는 55억달러(약 7조9200억원)의 가치를 평가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막대한 자금을 확보한 미국 VC들이 빠른 자본 소진을 위해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이트스피드, 안드레센 호로위츠, 스라이브 캐피털 등 대형 VC들은 지난해 수개월 만에 총 300억달러(약 43조2000억원)를 모금했으며, 공식적인 투자 유치에 나서지 않은 스타트업에도 먼저 현금을 제안하며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영국 VC 20VC의 줄리앙 코도르니우 파트너는 "두 달 전 동유럽의 한 창업가에게 투자하려다 와이콤비네이터와 경쟁해야 했다"며 "한 달 뒤 그 창업가는 미국 주요 투자자로부터 15분간의 통화 후 투자 조건서를 받았다"고 전했다.

유럽 창업가들도 미국 투자자들을 반기는 분위기다. 최근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14개의 투자 제안을 받은 독일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n8n의 창업자 얀 오버하우저는 "미국 투자자들이 훨씬 더 결단력이 있다"며 "가치 평가는 더 높은 경향이 있고 조건도 일반적으로 창업자에게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장기적인 출구 전략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세콰이어의 런던 지사를 설립했던 미국 VC 매트 밀러는 "유럽에서의 투자 회수 능력은 항상 우려되는 부분"이라며 "인수 가능성이나 상장 절차를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자본의 공세 속에서 유럽 현지 VC들은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밀러는 "안방에서 미국 투자자들과 경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유럽 펀드들이 많다"며 "매우 세계적인 스토리가 없다면 경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일부 유럽 VC들은 자금 외에 팟캐스트나 유명 창업가 커뮤니티 접근권 등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며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