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커지면서 50년 전과 같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 충격이 세계 경제를 덮칠 수 있다는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산하고 있다.
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시장 전문가들은 중동 분쟁이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을 교란해 인플레이션을 급등시키고 성장을 저해했던 1970년대 오일쇼크 시나리오가 재현될 위험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카스파 헨세 RBC 블루베이 자산운용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1970년대 시나리오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며 "전쟁이 장기화하고 유가가 더 오르면 국채 등 모든 자산의 안전자산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태그플레이션 공포의 진원지는 유가 급등이다. 이날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으며 연초 대비 70% 급등했다. 유럽 도매 가스 가격 역시 3년 만에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캐피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유가가 5% 오르면 선진국 인플레이션이 약 0.1%포인트 상승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유가가 10% 오를 때마다 세계 경제 생산량이 0.1~0.2%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과거 1973년, 1980년, 1990년, 2008년의 유가 급등은 모두 미국의 경기 침체로 이어진 바 있다.
유가 상승은 각국 중앙은행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면 경기 둔화를 더욱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그 어느 때보다 불편한 스태그플레이션 환경이 다가오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장의 금리 전망도 급변했다. 시장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최소 한 차례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보는 반면 분쟁 이전에는 40% 확률로 금리 인하를 점쳤다. 영국 중앙은행(BOE)에 대해서도 최소 두 차례 인하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인상 가능성을 보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투자자들은 채권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채권의 미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특히 단기 채권이 민감하게 반응해 지난주 영국 2년물 국채 금리는 50bp(1bp=0.01%포인트) 가까이 급등했으며 독일과 호주 2년물 금리도 30bp 이상 올랐다.
반면 미국은 유럽이나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이클 에브리 라보뱅크 수석 전략가는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으로 공급이 막힐 수 있는 원유, 비료 등 여러 원자재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주 미국 S&P500 지수는 2% 하락한 반면 유럽 증시는 5.5%, 아시아 증시는 6.3% 급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안전자산으로 부상한 것은 달러다. 달러는 전쟁 발발 우려가 커진 이후 거의 모든 선진국 통화에 대해 강세를 보였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킷 주크스 외환 전략 책임자는 "미국은 주요 산유국으로서 유가 충격을 견딜 수 있지만 유럽, 특히 영국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