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전쟁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참전 용사들이 18세기 고전 서사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 무대에 올라 화제다.
우크라이나 국립 몰로디 극장은 지난 목요일 이반 코틀랴레브스키의 '에네이다' 공연 초연을 선보였다고 미국 AP통신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작품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18세기 우크라이나 배경으로 재해석한 서사시다.
공연 배우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전 용사와 연극학도들이다. 이 중 상당수는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전선에서 돌아온 군 복무자들로, 절단 수술, 심각한 화상, 실명 등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은 이번 공연이 생애 첫 무대 경험이다.
올하 세미오슈키나 연출가는 "재활을 막 마치고 돌아온 이들과 함께 작업하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며 "약 4개월간 소통하고, 넘어지고, 모이고, 구르는 법을 배웠다"고 설명했다.
세미오슈키나 연출가는 이어 "의족을 벗고 그것 없이 존재하는 법을 익혔다"며 "이후 신체를 발전시키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초연까지 준비 기간은 1년 이상 걸렸다.
51세인 세미오슈키나 연출가의 연출 콘셉트는 간결하다. "무대 위 모든 남자는 아이네아스이고, 모든 여자는 디도"라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함락 이후 새로운 조국을 찾아 방랑한다. 코틀랴레브스키의 풍자적 각색에서는 트로이 영웅이 거칠고 현실적인 코사크 전사로 변신한다.
키이우 무대 위 아이네아스는 의족과 의수를 착용하고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러시아 침공 전쟁의 흉터를 지닌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이네아스는 자신의 땅을 찾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는 영웅"이라고 세미오슈키나 연출가는 말했다. 그는 "유머와 열정을 유지하고, 넘어지고, 공포를 겪고,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한다"며 "하지만 그는 인간이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족을 지킨다는 목표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투를 견딘 참전 용사들과 무대에서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아이네아스는 전쟁에 갔던 사람이다. 그렇다, 그는 불구가 되고 부서진 채 돌아왔다"면서도 이 각색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배우들은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리허설에서 러시아 침공 초기 심각한 화상을 입은 국경수비대 참전 용사 예호르 바벤코는 미소를 지으며 대사를 전했다. "직장에서 번아웃 느끼세요?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요."
극 후반부 그의 독백은 더욱 절실하다. 불이 자신의 손과 귀, 코를 앗아갔다고 말하며 "아이들에게 손가락 하나 없어진 마술은 못 보여줄 거예요. 아마 손가락 10개 모두 사라지는 마술은 가능할지 모르지만"이라고 연기한다.
바벤코는 무대에 설 기회가 치유의 여정이 됐다고 밝혔다. "저에게 연극은 심리적이면서 신체적인 재활"이라며 "제 몸을 더 잘 느끼고, 대중 앞에서 더 자신감 있어졌으며, 생각을 더 잘 표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는 자신의 땅을 찾는 것"이라며 "우리나라에 지금 매우 적절한 주제"라고 덧붙였다.
공연 마지막 막은 서사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배우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전투 부상, 전우의 죽음, 강제 이주, 점령 하 삶 등이 증언된다.
한 참전 용사는 드론 공격으로 다리를 잃고 기관총을 목발 삼아 엄폐물까지 기어갔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한 여성 배우는 두 딸과 함께 러시아 점령 하에서 살았던 경험을 회상했다.
또 다른 배우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불법 병합과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 친러 세력 장악 당시 그리고 2022년 러시아 침공 이후 다시 한번 의무병으로 자원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60대의 나이로 전쟁터에 돌아간 경험을 전했다.
2023년 도네츠크 지역 아브디이우카 인근 러시아 포격으로 시력을 잃은 안드리 오노프리옌코는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공연의 상당 부분을 내레이션했다. 한 장면에서 그는 "우리 적들이 구멍을 파고 십자가를 세워 스스로 누우라"고 노래했고, 나머지 배우들도 함께 합창했다.
오노프리옌코는 처음에는 프로젝트 참여를 거부했다. "시각장애인이 무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 그를 위한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설득을 받고 마음을 바꿨다.
"긍정, 웃음, 지지"라고 그는 리허설을 묘사했다. "어떤 기분으로 오든 큰 미소를 지으며 떠난다. 여기서는 현실에서 벗어난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의족과 의수는 공연의 시각적 언어 일부로 탈착됐다. 긴 금속 막대는 칼, 노, 목발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됐다. 예술적 도구이자 절단 수술을 받은 배우들의 균형을 돕는 실용적 도구였다.
전쟁은 목요일 막이 오르기 전부터 침투했다. 안내 방송은 관객에게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전환하라는 통상적인 극장 에티켓을 안내한 뒤, 공습 경보 발령 시 지하 대피소로 향하라고 경고했다. 정전이 발생하면 백업 발전기가 가동될 때까지 공연이 중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연 종료 몇 분 전 바벤코가 독백을 하던 중 실제로 정전이 발생했다.
세미오슈키나 연출가가 손전등을 들고 무대에 올라섰고, 다른 이들도 손전등을 든 채 뒤따랐다. 바벤코는 즉흥 조명의 빛줄기 속에서 대사를 이어갔다. 관객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거나 눈물 속에서 웃으며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독백이 끝나고 막이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을 때, 배우들은 기립박수를 받았다. 두 번째 인사를 할 때 전기가 복구됐고,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세미오슈키나 연출가에게 무대에 선 참전 용사들의 메시지는 서사시와 극장 벽을 넘어선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모든 참전 용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밖으로 나오라"고 그는 말했다. "나오라. 당신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살아라. 스스로를 가두지 마라. 매 순간을 살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