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점령 하의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주민들이 전쟁 4년째를 맞아 주거, 식수, 난방 등 생활 인프라 붕괴와 함께 친(親)우크라이나 성향 색출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AP통신은 8일(현지시간) 러시아 점령 지역을 탈출한 주민들의 증언을 인용해 마리우폴 등 주요 도시들이 여전히 심각한 주거·전력·난방·의료 문제를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전면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점령했다. 해당 지역에는 약 300만~500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동부 쿠드리아쉬프카 마을에 살았던 이나 브누코바(42)는 에스토니아로 탈출한 뒤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은 기관총을 휘두르며 주민들을 괴롭히고 검문소를 세우고 집을 약탈했다"고 말했다.

브누코바는 러시아군이 친우크라이나 성향자와 공무원을 색출하자 2022년 3월 중순 당시 16세였던 아들 젠야와 함께 남편을 남겨둔 채 흰 천을 흔들며 박격포 사격 속에서 인근 스타로빌스크로 탈출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이미 삶에 작별을 고했고 러시아 세계를 저주했다"며 "4년 동안 이 악몽을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시민자유센터의 미하일로 사바는 "러시아 특수부대는 반러 성향의 우크라이나인을 계속 색출하고 자백을 강요하며 구금하고 있다"며 "주민들은 일상적으로 신분증 검사, 대규모 수색, 밀고에 직면한다"고 밝혔다.

인권단체들은 러시아 당국이 '여과 수용소'를 통해 잠재적 반체제 인사와 정부 근무자, 우크라이나군 지원자, 군인 친척, 언론인, 교사, 과학자, 정치인을 색출했다고 지적했다.

헤르손주 노바 카호프카에 살았던 스타니슬라프 슈쿠타(25)는 2023년 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으로 탈출하기 전 여러 차례 체포 위기를 모면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버스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정지당했는데 남녀 모두 허리까지 옷을 벗고 우크라이나 문신이 있는지 검사받았다"며 "휴대전화에서 모든 것을 지웠는지 궁금해 하며 공포에 질렸다"고 말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인 시민자유센터의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 대표는 "러시아는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기소 없이 무기한 구금하는 비밀 및 공식 구금 시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인권옴부즈만 드미트로 루비네츠는 약 1만6000명의 민간인이 불법 구금됐으나 많은 이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수감돼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엔 보고서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점령 지역에서 구금됐던 민간인 57명을 면담한 결과 52명이 심각한 구타, 전기 고문, 성폭력, 모욕, 폭력 위협을 당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점령 지역 주민들은 심각한 생활 인프라 부족에도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는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자포리자 4개 불법 합병 지역 주민에게 러시아 시민권과 언어, 문화를 강요하고 있다. 의료 서비스 등을 받으려면 러시아 여권이 필수다.

2025년 봄까지 4개 지역에서 약 350만 명이 러시아 여권을 받았다.

2022년 5월 러시아에 함락된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경우 전쟁 전 약 50만 명이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폐허 위에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집을 잃은 주민 대신 러시아 이주민에게 팔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마리우폴에서 최소 1만2191채의 아파트가 '무주택' 명단에 올라 몰수됐다. 수천 채가 다른 지역에서도 압류되고 있다.

루한스크주 알체프스크 시는 절반 이상의 가정이 혹한 속에 두 달간 난방 없이 지냈다. 온열 대피소 5곳이 설치됐으며 공공사업체는 시 난방 네트워크의 60% 이상이 수리 자금 없이 열악한 상태라고 밝혔다.

도네츠크주에서는 물 공급 트럭이 아파트 단지 밖 통을 채우지만 겨울에는 얼어붙는다고 익명의 주민이 전했다. 그는 "물을 두고 끊임없이 다툼이 있다"며 "줄이 엄청나고 직장에 있는 사람들은 트럭 도착을 놓치곤 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4개 지역의 어려움을 인정하며 "해방된 도시와 마을 주민들에게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며 "정말 시급하고 긴급한 문제가 많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안정적인 물 공급과 의료 서비스 접근 등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해당 지역을 위한 "대규모 사회경제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로 탈출한 이나 브누코바는 남편 올렉시와 함께 현재 1세 딸 알리사를 키우며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다. 한때 800명이 살던 그들의 마을에는 부부의 부모를 포함해 약 150명만 남아 있다고 그는 전했다.

브누코바는 "4년 동안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점점 더 궁금해진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