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 선구자이자 교육 분야의 거목인 노먼 C. 프랜시스가 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94세다.

루이지애나주 전역의 지역사회 구성원과 활동가, 지도자들은 프랜시스의 삶과 업적을 기렸다.

프랜시스의 사망을 확인한 자비에대학교의 레이놀드 베렛 총장은 성명을 통해 "우리 곁에 살아계셨기에 미국은 더 나은, 더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프랜시스는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이후 루이지애나주 재건 대응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재건 사업을 총괄하는 루이지애나 복구청을 이끌었다.

미치 랜드류 전 뉴올리언스 시장은 카트리나 이후 프랜시스가 "최전선에 섰다"라고 말했다. 2005년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초토화했을 당시 부지사로 재직했던 랜드류는 "가장 힘든 순간들"을 포함해 자주 프랜시스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전했다.

랜드류는 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X를 통해 "그의 성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모든 인간을 존엄과 존중으로 대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프랜시스는 미국 유일의 흑인 중심 가톨릭 대학인 뉴올리언스 자비에대학교 총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68년부터 47년간 총장직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기부금은 크게 늘었으며 캠퍼스는 확장됐다.

이 작은 대학은 흑인 학부생들을 의료 전문직으로 양성하고 생물학, 화학, 물리학, 약학 등의 분야에서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카트리나 허리케인 이후 캠퍼스 일부가 2.4미터 높이의 물에 잠겼을 때도 프랜시스는 학교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포함한 여러 인권단체는 프랜시스를 미국 최고의 대학 총장 중 한 명으로 기렸다. 2006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프랜시스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트로이 카터 루이지애나주 연방 하원의원은 소셜미디어에 "프랜시스 박사는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었다"라며 "그는 교육기관 건설자이자 인권 옹호자였으며 조용한 관대함을 지닌 사람이었다"라고 추모했다.

카터 의원은 "그는 교육이 정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라며 "한 학생을 일으켜 세우면 가족 전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덧붙였다.

이발사의 아들로 루이지애나주 라파예트에서 자란 프랜시스는 1952년 자비에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로욜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됐으며, 1955년 법학 학위를 취득하며 학교 인종 통합을 이뤄냈다.

이후 그는 2년간 육군에서 복무한 뒤 연방 기관의 인종 통합을 돕기 위해 연방 법무부에 합류했다.

당시에도 그는 인종을 이유로 뉴올리언스의 많은 호텔, 식당, 백화점에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프랜시스는 2008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견뎠느냐'고 묻는다"라며 "부모님이 '너는 미국 대통령이 될 만큼 훌륭하다'고 말씀하신 그 말을 언젠가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견딜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1957년 그는 자비에대학교에 학생처장으로 합류하며 수십 년간 이어진 대학 경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