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 목사의 후계자로 수십 년간 미국 민권운동을 이끌어온 제시 잭슨 목사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잭슨 목사 가족은 5일(현지시간) 온라인 성명을 통해 그가 이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고 밝혔다.

잭슨 목사는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서 킹 목사가 암살당할 당시 함께 있었다. 이후 킹 목사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평생 미국과 해외에서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투표권과 일자리 기회부터 교육과 의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이슈를 다뤘으며, 세계 지도자들과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레인보우/푸시 연합(Rainbow/PUSH Coalition)을 통해 잭슨 목사는 흑인의 자긍심과 자결권에 대한 요구를 기업 이사회로 전달했다. 미국을 더 개방적이고 공평한 사회로 만들도록 압박했다.

"나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입니다. 나는 어릴지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입니다. 나는 복지 혜택을 받을지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입니다"라는 그의 시구는 모든 인종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잭슨 목사는 1941년 10월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고등학생이던 헬렌 번스와 기혼남 노아 루이스 로빈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어머니와 결혼한 찰스 헨리 잭슨에게 입양됐다.

그는 그린빌 스털링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스타 쿼터백이었으며 일리노이대학교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흑인은 쿼터백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 노스캐롤라이나 A&T대학교로 편입했다.

1960년 역사적으로 흑인 대학인 이 캠퍼스에 도착한 잭슨은 당시 막 시작된 민권운동에 몰입했다. 1965년 그는 킹 목사가 이끈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투표권 행진에 합류했다.

킹 목사는 그를 시카고로 파견해 흑인 고용을 촉진하기 위한 '오퍼레이션 브레드바스켓'을 시작했다. 잭슨 목사는 킹 목사와 함께한 시간을 "경이로운 4년간의 작업"이라고 회상했다.

1971년 잭슨 목사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에서 분리해 '인류를 구하기 위해 뭉친 사람들(People United to Save Humanity)'이라는 뜻의 오퍼레이션 푸시를 설립했다.

그는 소송과 불매운동 위협을 활용해 주요 기업들이 수백만 달러를 지출하고 인력 다양화를 공개적으로 약속하도록 압박했다.

1963년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재클린 라비니아 브라운과 결혼한 잭슨 목사는 5명의 자녀를 뒀다. 이 중 조너선 루서 잭슨과 제시 L. 잭슨 주니어는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1968년 침례교 목사로 안수받은 잭슨 목사는 2000년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레인보우/푸시의 직원이었던 카렌 L. 스탠퍼드와의 사이에서 딸 애슐리 잭슨을 낳았다고 인정하며 정서적·경제적으로 지원해왔다고 밝혔다.

말년에 뇌질환으로 거동과 언어 능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았음에도 잭슨 목사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시대까지 인종 불의에 맞서 싸웠다.

2024년 그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휴전 결의안을 지지하는 시의회 회의에 참석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재판 전 미니애폴리스 행진에서 그는 "이긴다 해도 그건 안도일 뿐 승리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폭력을 멈추고 아이들을 구하자. 희망을 살려두자"고 말했다.

잭슨 목사는 2011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일생의 일부는 벽을 허물고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반세기 작업 끝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벽을 무너뜨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벽을 허물 때 무너지는 잔해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당신의 임무는 당신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갈 수 있도록 구멍을 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24시간 간호를 받으며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그는 가족 및 방문객과 손을 잡고 악수하며 소통했다.

그의 아들 제시 잭슨 주니어는 지난해 10월 AP통신에 "이 연설들이 이제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면 매우 감정적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