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비만 치료제 GLP-1 약물의 확산이 경제 전반에 걸쳐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식욕 억제 효과를 지닌 이 약물이 정크푸드, 주류, 담배 등 '해로운 재화' 시장을 위축시키면서 정부의 전통적 소비 억제 정책 효과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제학에서 해로운 재화는 소비자가 그 부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해 과다 소비하는 재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부정적 외부효과만 발생시키는 재화와 달리, 소비자 자신의 건강과 복지를 직접 해치면서도 중독성이나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과소비되는 특징을 지닌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7일 GLP-1 약물 사용 확산이 식품·주류·제약 업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세마글루타이드 성분의 위고비, 오젬픽 등 GLP-1 약물은 식욕을 억제해 체중 감량 효과를 내는 동시에 정크푸드와 알코올에 대한 갈망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는 최근 수백만 명의 비만 환자에게 GLP-1 약물을 처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영국 인구의 상당 부분이 약물을 통해 소비 패턴을 바꾸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GLP-1 약물 사용자들의 패스트푸드 및 탄산음료 소비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월마트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도 GLP-1 약물 사용자들의 식품 구매 패턴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GLP-1 약물은 단순한 체중 감량제가 아니라 소비자 행동 자체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라며 "정크푸드, 주류, 담배 업계는 근본적인 사업 모델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그동안 해로운 재화의 과소비를 막기 위해 다양한 '넛지' 정책을 시행해왔다. 2018년 도입된 설탕세는 고당분 음료에 세금을 부과해 제조업체의 당분 함량 감축을 유도했다. 또한 정크푸드 광고 규제, 슈퍼마켓 계산대 근처 고칼로리 제품 진열 금지, 칼로리 표시 의무화 등의 정책도 시행 중이다.

담배 분야에서는 포장 표준화, 흡연 경고 이미지 의무화, 공공장소 흡연 금지 등이 시행됐다. 주류 분야에서도 최소 단위 가격제, 광고 제한 등이 도입됐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정책들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영국의 비만율은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현재 성인의 약 28%가 비만으로 분류된다.

경제학자들은 GLP-1 약물이 해로운 재화 시장에 공급 곡선 이동이 아닌 수요 곡선의 근본적 이동을 초래한다고 분석한다. 세금이나 규제가 가격을 올려 수요량을 줄이는 방식이라면, GLP-1 약물은 소비자의 선호 자체를 바꿔 수요 곡선 전체를 왼쪽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다.

한 행동경제학 전문가는 "넛지 정책은 소비자가 여전히 유혹을 느끼는 상황에서 선택 환경을 바꾸는 것이지만, GLP-1 약물은 유혹 자체를 제거한다"며 "이는 정책 효과성 측면에서 차원이 다른 접근"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영국 보건당국 내부에서는 GLP-1 약물을 공공보건 정책의 핵심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보건서비스를 통한 대규모 무상 처방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만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장기 복용 시 부작용 우려, 약물 의존도 증가, 천문학적 재정 부담 등이 지적된다. 영국 재무부 추산에 따르면 전체 비만 인구에게 GLP-1 약물을 처방할 경우 연간 100억 파운드(약 17조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

윤리적 논란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개인의 식습관과 생활방식 문제를 약물로 해결하려는 것은 근본 원인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건강한 식품 접근성 개선, 운동 환경 조성 등 구조적 접근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해로운 재화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이미 대응에 나섰다. 코카콜라, 펩시코 등 음료 대기업들은 제로 슈거 제품 라인을 확대하고 있으며, 맥도날드를 비롯한 패스트푸드 체인들도 저칼로리 메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담배 업계도 변화를 모색 중이다. 필립모리스,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 등은 전자담배와 니코틴 파우치 등 '위해 저감 제품'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고 있다.

한 식품업계 임원은 "GLP-1 약물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추세"라며 "건강 지향 소비자 니즈에 맞춘 제품 혁신만이 생존 전략"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오는 9월 해로운 재화 소비 억제를 위한 종합 정책 패키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GLP-1 약물의 공공보건 정책 편입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번 논쟁이 시장 실패 해결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고 평가한다. 전통적 재정 정책과 규제, 행동경제학 기반 넛지, 약물을 통한 직접 개입 중 어느 것이 효과적이고 윤리적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국 보건부 관계자는 "GLP-1 약물은 비만 문제 해결의 만능 해법이 아니다"라며 "다만 기존 정책들이 한계를 보인 만큼 새로운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열린 자세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