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년 전 농경과 도시가 발달하기 이전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흑사병(페스트)이 이미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유행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은 17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동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지역의 수렵채집인 공동묘지 4곳에서 발굴된 유골의 DNA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치아에 보존된 고대 박테리아 유전체를 재구성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흑사병 균주를 발견했다. 분석 대상 유골 46구 중 18구(약 40%)에서 흑사병균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의 DNA가 검출됐다.
이는 일부 중세 흑사병 희생자 집단 매장지에서 보고된 검출률보다도 높은 수치다. 이번 발견은 초기 흑사병이 가벼운 질병이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것이다.
과거 연구에서는 초기 흑사병 균주가 벼룩을 통해 효율적으로 퍼지는 데 필요한 유전적 특성이 없어 대규모 유행을 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연구팀은 공동묘지의 사망자 연령 분포에서 어린이와 10대 초반 청소년의 비율이 이례적으로 높은 점에 주목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다수의 매장이 매우 짧은 기간에 집중됐고 형제나 부모·자녀가 함께 묻힌 사례도 확인됐다.
특히 고대 흑사병 균주는 후기 균주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슈퍼항원'(superantigen)을 가지고 있었다. 슈퍼항원은 극단적인 면역 반응을 유발해 감염의 심각성을 높이는 독소 생성 유전자다.
연구팀은 "벼룩을 통한 효율적인 전파 능력이 진화하기 전에도 고대 균주들은 감염을 매우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독성 인자 조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흑사병이 중앙아시아나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해 설치류를 통해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연구팀은 당시 수렵채집인들이 오늘날에도 흑사병을 옮기는 설치류인 마멋과 밀접하게 접촉하며 직접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