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해안에서 발견돼 30여년간 로마 시대 유물로 알려졌던 투구 수십 점이 실제로는 중세 후기 군사 화물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 알리칸테대와 이탈리아 살레르노대 공동 연구팀은 5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앤티쿼티'에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1990년 스페인 베니카를로 연안의 수중 유적지에서 발견된 투구 43점의 제작 연대를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로 새로 규명했다.

이 투구들은 1990년 지역 어부들이 조업 중 그물에 걸린 금속 덩어리 안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발견 당시부터 로마 시대 유물로 분류됐으나, 이번 연구로 30여년 만에 정체가 바로잡혔다.

연구팀은 투구 내부에서 보존된 직물 조각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정확한 제작 시기를 특정했다. 이는 현재까지 서부 지중해에서 발견된 중세 투구 중 가장 큰 규모다.

연구를 이끈 마누엘 프랄리치아르디 연구원은 "초기에는 후기 로마 양식과 중세 양식이 섞여 있어 시대 특정이 어려웠다"며 "과학적 분석 결과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투구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 투구들이 대규모 무기 거래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평가했다. 당시 해상 강국이던 제노바 등 이탈리아 북부와 스페인 발렌시아 해안을 잇는 체계적인 무기 교역망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라이몬 그라엘스 알리칸테대 교수는 "단순한 고고학적 호기심을 넘어, 과거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던 교류 및 통신망을 드러내는 발견"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투구들은 수심 6m의 얕은 곳에서 발견됐다. 연구팀은 선적이나 하역 작업 중 사고로 화물 일부가 바다에 빠졌고, 모래 밑에 갇히면서 수백 년간 모습을 감췄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지중해는 이슬람 해적의 활동이 늘고 해안선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방어용 무기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이 투구 화물은 발렌시아 왕국의 군대나 지역 민병대에게 공급될 예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